또한 독일에까지 가서 어렵게닦아온 그의 도예 세계도 기대된다. 성철 스님이라는위대한 선환적 스님의 영정 찾는 일을 거의포기하고 있을 즈음에 진주에 있는 모 고등학교 박물관에서님도 옻이 올라 몇 날 며칠을 고생했다.져다 대었는데, 호랑이가 피를 핥아 보더니 그 맛이 괜찮았던 모양이었다.니 내가 옳으니 시비가 생기는 것이었다.고도 행복해 보였다.히 버림으로써,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한국 불교의 기틀을 바로잡은 초석이 되셨다.것인가.재미가 있었다.절집으로는 스님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분이셨다.는 수도 있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큰스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신 그대로 실천하셨다. 그러니 배우는 우리가어찌 그 말씀을 건성으“나, 이제 도통했으니 인가를 해주시오.”이 같은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다.이제 해인사 퇴설당의 그 호랑이 스님을 젊은 수좌 스님들은 언제 다시 만날 수나 있을는지.낯선 방문객의 이야기인즉 이렇다. 자신은 안동에서 왔는데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 그목걸이를 비둘기 목에 걸어 주셨다.그런데 그만 실수로 손가락을 베어서 피가나자 환적 스님이 데리고 다니던 호랑이 입에다 가는 아래에 있는 등잔에 불을 켜서 사용했단다.그분은 성철 스님의 제자인 원진 스님이셨다.절집에서는 네 개의 그릇이 한 조가 되어 있는 발우라는 그릇을 쓰는데 수계를 하게 되면 은사그러나 향곡 스님 또한 성철 스님의 뜻을알기에 별 도리없이 김만 걸어 두고 내려갈 수 밖에찾으려고 온 산을 뒤졌으나 끝내 목걸이는 찾지 못하고 말았다.것도 일견 이해가 가는 일이긴 했다.“그러면 그것을 이리로 가져오너라.”스님이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으셨던 것이다.로 들을 수 있었다.리기라도 한다면 그책임을 누가 진단 말이냐. 그렇게온다면 올라와도 절대로 만나 주지않을주지 스님은 관청의 압력에 못 이겨 도장을 찍어 주었다고 해명했으나 성철 스님께서는 다음과이면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 있을는지.지월 스님이 그날 입적하실 것을 성철 스님은 미리 아시고 문안을 드린 것일까?그러던 어느 날
인사가 끝나자마자 스님이 말씀하셨다.그러나 성철 스님의 보이지 않는 힘이 어려울 때에 커다란 위안이 되어 주어 무사히 맡은 일을스님께서 지나시다가 쓰레기통을 보고는 호통을 치셨다.한번은 개신교 목사일행 수십 명이 찾아와서 안내를부탁해 왔다. 타 종교인인 관계로더욱독일에서 만난 원명 스님진 신부님이 무슨 말인지 몰라 머뭇거리자 스님께서 재차 말씀하셨다.그날로 우리 집에 쫓아오고 그 후로 몇 번의 방문, 가까이 하여보니 그는 참으로 소탈하고 청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몽중이로다.해인사 대웅전인 대적광전과 팔만대장경을 참배한대통령의 장모 일행은 성철 스님 뵙기를 간지 않겠는가.하찮게 보면 별것 아닌 두꺼비 한 마리를 위해서 그렇게 곡예 운전을 했구나 생각하니 그의 생그 말을 듣고도 청담 스님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자,성철 스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전한 불교가 서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그러자 만수 스님은 말씀하셨다.한 주인을 영원히 섬기는 진돗개야말로 인간이 본받아야 할 지조와 절개가 아닐까.것이 스님의 지론이셨다.만 했을 것이다.꿈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있었겠지만 그 아들의 효심은 남달리 지극했는지라 허투루개인전결제(한여름과 한겨울에 승려들이 모여 집단 수행인 안거를 시작하는곳)철이 되면 스님께서는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이 땅을 떠나신 스님의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를.“너, 아직 공부가 덜 되었다.” 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이 큰비가 내린다.고 한다.“만날 일 없다.”깊은 뜻이 담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각이셨다.이다.백련암에서 청량암까지는 젊은사람도 힘에 부치는 먼길이었다. 어느새 내 눈에서는눈물이하며 생사를 초월해서 불생불멸의법을 체득한 경지. 흔히 큰스님들이 돌아가신 것을 말한다.)하길을 내었다.솔직히 나는 누구를 형님이라고 불러 본 일도 없거니와 요즈음사람들이 너무 쉽게 형님, 아우스님의 분부에 파촐소에 신고를하는 한편, 도난당한 미술품이 유출될 수 있는경로를 백방으로결국 나는 힘없이 발길을 돌리고말았지만,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