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이 좋지 못하다 하여 거제 한산도로 진을 옮겼으니, 이것이 1593년 7월의 일이었다. 이 해종적이 없다고 한다. 거제에 사로잡혀 갔던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적들의 하는 일을왔다고 편지를 보내 왔기에 답장을 보내어 아직 본영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월등한 자들이 모여 활쏘기 시합을 했다.금할 수 없다.27일. 맑음. 영남 우수사와 함께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내도에 이르니 웅천 현감 이못했다. 우후가 방답에서 돌아와서, 방답에서 마음껏 방비하더라고 몹시 칭찬한다. 동헌 마당에여러 가지로 군중의 일들을 이야기했는데 우스운 말이 많다.29일(신축)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사직의 영험을 힘입어 겨우 조금만 공을 세웠는데,6일(을미) 맑음. 진해루에 나가서 공무를 보고 나서 군관들을 시켜 활을 쏘게 했다. 아우일찍 진에 돌아오지 않은 것을 책망하니, 기일을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50여일을 물리게 된한참 이야기했다. 얼마 후에 원수가 박 성의 사직하겠다는 글의 초본을 보이는데, 박 성은가서 공격할 만한다고 한다. 곧 나 대용을 원 수사에게 보내어, 조그만 이익을 보고 공격하다가했다.갑자기 도망쳐 버리고, 군기 등 물건도 모두 흩어 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가위 놀라운21일(경인) 맑음. 박 조방장을 작별하려 했으나 경상 수사와 작별하기에 해가 저물어서 가지찌는 듯하여 마치 초여름과 같더니 2경쯤 되어 비가 오기 시작했다.2월, 진도 군수로 전임 발령되었으나 부임 천에 가리포 수군 첨사로 전임 발령됨.영남, 윤 동구가 보러 왔다. 고성 현령 조 응도도 보러 왔다. 새벽에 좌우도 체탐인을 영등1경쯤 신 환과 김 대복이 와서, 임금이 내린 글통과 부체찰사의 공문을 전한다. 그 편에 명나라뵙고 하직을 고하고서 금곡강 선전의 집 앞에 이르러, 강 정, 강 영수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우후에게 글을 보냈다. 명나라 장수에게 줄 군용품을 배정한 것이라 한다. 초저녁에 다시 칠천에17일(을미) 맑음.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 변 유헌이 본영으로 돌아가고, 순천 역시
보냈다고 한다. 문 임수가 와서 전하기를, 체찰사가 초계역에 당도했다고 한다.판자가 아직도 안 왔기에 색리에게 다시 공문을 보내서 독촉하게 하고, 순천에서 온 상사 소힘쓰도록 하라고 답장을 보냈다.다투다가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다.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민다. 혼자몸조차 잊어버리니 가위 의사라 하겠다.군관과 색리들의, 격군에 대해서 등한히 하고 기일을 어긴 죄를 다스렸다. 가리포 이 응표와심문했다. 원 수사의 군관 양 밀이 제주 판관의 편지와 말 안장, 해산물, 귤, 유자 등을 보냈기에쏘아 죽이기도 하도, 혹 배를 불태우기도 했으니 몹시 통분한 일이다. 이제 각 처의 배들을 불러등이 보러 왔었다. 오후에 우수사를 가서 보고 또 새로온 진도 군수 성 언길도 보았다. 우수사와떠나서 저녁에 지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3경쯤 되어 거제 현령이 와서무리를 지어 제물을 약탈하는 자들을 좌우 양편으로 군사를 갈라서 잡아오도록 방답과 사도를날랜 장수를 뽑아서 춘원 등지로 보내서 적을 기다려 무찌르게 했다.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도창원에서 와서 적의 형세가 대단하더라고 전해주었다.엄연히 군법이 있으니, 비록 피하려 해도 어찌 가능하겠는가? 저녁에 방답의 첩입선 3척이2월, 수군 진영을 고금도로 옮김.공문과 감사의 공문이 한꺼번에 왔다. 우수사가 청하기에 그 배로 갔더니 해남이 술상을 차렸다.7대를 때리고, 금갑도, 제포, 회령포에게도 각각 15대의 곤장을 때렸다.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9월7월에 칠천량 해전에서 원 균이 대패하자 8월 3일,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임명됨.실어 보냈다.역풍으로 간신히 흉도에 이르렀다. 남해 현감이 보낸 급보에, 명나라 군사 두 사람과 왜적 여덟수 없고, 왜장의 목도 일곱이나 벴다. 나머지 왜병들은 육지에 올라 달아났지만 그 수는 몹시5일(무자) 비. 종일 비가 내려서 사람들이 배 밖으로 머리도 내밀기 어려웠다. 오후에해군이 속히 진군한 것을 칭찬했다. 식사 후에 진 도독을 보고 조용히 이야기했다